:: 여행 ::/국내

[곡성/하동] 곡성 기차 마을 • 지리산 형제봉주막, 아내와 연애시절 떠난 첫여행

vegandent 2014. 2. 3. 12:34
아내와 운명적으로 만나 연애를 한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지금은 돌이 지나 "엄마, 아빠" 사랑스럽게 외치며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려는 아기와 셋이서 오붓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데, 세월이 참 빠르게 흐른다 싶어 다시 한 번 놀랐다. 최근 허리디스크 재수술 이후 하루종일 누워서 지내다보니 휴대폰에 저장된 옛날 사진들 보며 추억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는데, 아내와 연애시절 처음으로 떠났던 여행 사진을 보다가 그 설렜던 마음을 담아 보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둘 다 돌아다니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싫어하면 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텐데, 돌아다녀야 기분이 좋아지는 우리 부부는 이런 면에서도 천생연분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첫여행지는 그리 멀지 않은 지리산을 선택했다. 엄밀히 말하면 지리산이라기보다는 하동, 특히 악양면에 있는 형제봉주막이 목적지였다. 형제봉주막은 공지영 작가가 그녀의 저서 <지리산 행복학교>에서도 말한 것처럼 지인들(도사, 시인 등)과 종종 들르는 곳이기도 한데, 특히 주인장께서 손수 만드신 안주와 별미인 악양 막거리를 한 잔 걸치면 나도 지리산 도인이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어 아내도 소개해 주고 싶었다.

하동으로 향하는 길에 곡성이 보이길래 잠깐 곡성 기차 마을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시간적인 여유도 많았고 얽매이지 않는 여행을 좋아하기에 계획이란 것은 애초 존재하지도 않았고 일정은 즉흥적으로 조정했다. 겨울이라 장미 축제는 하지 않았지만 동물 구경도 할 수 있었고 증기기관차(?)는 운행 중이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에 타기로 했다. 무계획 여행의 단점이라면 이렇게 놓치는 즐길거리도 많다는 점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하동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슬슬 배가 고파서 지리산 맛집이라는 곳을 검색해서 찾아갔더니 안타깝게도 영업을 하지 않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췟. 근처 식당에서 대충 허기를 달래고 형제봉주막에서 맛난 안주와 막걸리를 먹기 위해 냅다 달렸다.

형제봉주막은 예전에 한 번 가본적이 있어서 근처에 가면 찾기 쉬울 줄 알았는데 내 능력을 너무 맹신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니 더욱 길을 찾기가 어려웠고 블로그에서 본 주소로 안내하는 네비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한참을 달렸을까?

어랏?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가파르게 오른 적이 없었는데..'

길은 갑자기 좁아지고 도로 같지도 않은 곳을 계속 오르다보니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빛이라곤 우리 차에서 나오는 헤드라이트 뿐이었다. 우리 차량은 산중턱에 정지해 있었고 네비에서 뿜어내는 밝은 조명에 반사되어 아내의 상기된 얼굴이 희미하게 비쳐보였다.

암흑같이 어두운 지리산 중턱에 정차한 차 안에 젊은 두 남녀가 길을 잃고 겁에 질린 얼굴만이 네비게이션 조명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는 상황을 3인칭 시점에서 바라본다고 생각하니 이건 무슨 스릴러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다 싶어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실종되어도 하나도 안 이상할 것 같았다. 이건 아니다 싶어 얼른 차를 돌려 '도로'로 내려왔다.

길가에 파출소가 있어 길을 물어물어 마침내 우리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형제봉주막에 도착했다.




주막 안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두부김치와 파전 그리고 악양 막걸리를 주문했다. 악양 막걸리는 좀 세기 때문에 맛있다고 막 마시면 어느 순간 정신을 놓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아내에게 주의를 줬다.



분위기가 좋으면 주인장 어르신의 수준급 기타 연주와 노래를 들을 수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린 맛난 안주와 막걸리만이 주어질 뿐이었다. 그래도 한모금 막걸리를 맛보더니 맛있다며 연거푸 넘기던 아내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고생(?)하고 긴장이 풀린 후 술을 마시니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나는 어차피 한 잔 마셔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지만 말이다. 벽에는 다양한 낙서(?) 및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우리도 매직펜을 빌려 추억을 남겼다




마지막 잔을 들이키고 혹시 주변에 묵을만한 숙소가 없는지 주인장께 여쭤보았다. 그렇다. 우린 형제봉주막만 보고 달려온 터라 하룻밤 보낼 곳도 미처 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근처에 민박집이 있어 그리로 이동했다.





짐을 풀고 우리는 챙겨온 샴페인을 마시려고 준비했다. 쉽게 딸 수 있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코르크 마개로 막혀 있었다. 와인 오프너도 없는데... 순간 절망감이 몰려왔다. 이놈의 준비성... 마침 티비에서 구두굽으로 병밑을 쳐서 코르크마개를 따는 실험을 본 적 있다고 그렇게 해보자고 아내가 제안했다.



병을 수건으로 감싼 후 구두굽으로도 때려보고 밖에 나가 바위에 수차례 내리치기도 해보고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겨우 몇 센티만 올라왔다. 아래 식당에도 내려가 보았는데 와인 오프너가 있을리 만무하고 포크에 의존하여 남은 코르크를 후벼파서 겨우겨우 꺼냈다. 대량의 술은 넘쳐흘러 이미 바닥을 흥건히 적셨고 두 잔 겨우 따라 한모금씩 하고 잠을 청했다. 결과적으로 맛도 별로 없었는데 술김에 그렇게 집착했었던 것 같다. 피곤했는지 우리는 이내 깊이 잠이 들었다.

우리의 첫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